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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17-05-31 오후 5:28:12 조회수 1191
E-mail webmaster@nfsi.or.kr  작성자 관리자
   
  <본사사옥앞에 서잇는 친근한 조형물>
   

 

 

우리는 가끔 공기업이나 공적자금이 투입된 회사 사람들의 모럴 해저드에 대한 뉴스를 접하곤 한다. 소위, ‘도덕적 해이’로 점철된 것 같은 느낌을 받곤 하는데 이 사람을 보면 전혀 딴 나라 사람 얘기처럼 들린다.

황희 정승이 태어난 고향의 정기를 받아서일까?

꼿꼿한 성품의 그가 한 눈 팔지 않고 정년퇴임이라는 금자탑을 세우기까지 바른생활이라는 잣대가 한몫했을 법하다. 또한 일본의 우경화를 우려하고 나아가 정신대 할머니를 가족처럼 여기는 것은 어쩌면 필연적인 얘기가 아닐까 싶다.

이 시대에 가장 요구되는 청렴상인 우리의 자랑, 장일석 동문의 삶과 철학을 찬찬히 들여다보자.

   
 
   
  < 즐거운 마음으로 일한다는 장일석 동문이 환하게 웃고 있다 >
   
 

Q1. 먼저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제 홈페이지(www.장일석.kr)에 저에 관한 소개가 자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같은 동문들끼리 서로 한 번쯤은 사랑방에 다녀가시는 것이 좋지 않을 런지요? 서로 도울 것이 있으면 돕고 줄 것이 있으면 주기 위해서 말입니다.

저는 장수 번암에서 44년에 출생해서 번암 국민 학교를 나와 남원 중학교와 남원 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저는 중학교 때와 고등학교 때 각각 1년씩을 주저앉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3살 터울의 동생과 그리고 그 동생 동기들과 졸업을 함께 하게 됩니다.

저는 남원에서(학교 다닐 때는 ‘장길현’이라는 이름이었음) 코만치라는 동아리를 설립하여 남원만을 무대로 하지 않고, 아래로는 순천, 여수, 광주까지, 위로는 전주에서 이리까지 헤매고 다니다보니, 중학교 때 1년, 고등학교 때 1년씩을 소모한답니다. 그 때 저는 대단했답니다!

그리고 한양 대학에 입학을 해서 졸업 후 고시를 해야겠다는 일념으로, 성균관 대학 법학과에 다시 입학하여 고시 공부를 시작하게 됩니다. 당시 30명밖에 뽑지 않는 사법 시험에 매달려 젊음과 그리고 몸을 다 망치게 되지요. 그때는 눈을 떠서 하루 종일 딱딱한 독서실 책상에서 앉아 있었던 일로 지금은 허리를 쓸 수 없을 지경으로 만들어져, 요즘 골프에 적지 않은 지장이 되고 있답니다. 저는 거듭되는 고시 실패를 뒤로하고 차선책으로 재정 직에 응시하여 재무부에 입사했고, 그곳에서 한평생을 보내게 됩니다.

잠깐 재무부를 소개하면, 재무부 인적 구성은 행정고시 1등에서 5등까지, 그리고 고시 출신을 비롯해서 서울 대학 졸업생 등이 95% 이상을 점유하고 있어 당시 재무부는 한국 인재의 총 본거지라고 말 할 수 있는 곳입니다. 저는 그 곳 사람들과 경쟁하면서 살아야 했으니까요! 당시 재무부는 다른 부처에서 근무 하고자 왔다가 적응을 하지 못하고 다시 다른 부처로 옮겨간 공무원들이 부지기수입니다!

   
 
   
  < 서울대 최고 경영자 과정에서 투명 사회와 금융에 관해 강의하고 있다 >
   
 

Q2. 정년퇴임까지 오랫동안 공무원으로 몸담을 수 있었던 원동력은?

저는 번암 장씨 부유한 농가에서 태어나 넉넉한 유년기를 보내게 됩니다. 동학란을 치르면서 동학란을 피하기 위하여 번암으로 두 딸을 데리고 들어와 산골짝 움막에 피신을 한, 한 할아버지가 두 딸 중 큰딸은 남원 고등학교 5대 총동창회장을 지낸 박공희씨 집으로, 작은딸은 우리 집에 주어 우리 집으로 시집오시게 되었고, 그래서 저의 할머니가 된 분은 매우 훌륭한 분이었습니다.

지금도 가끔 말이지요, 늦은 밤 할머니께서 이야기책을 소리 내어 읽던 일들이 기억이 나곤 합니다. 저는 요즘도 신문을 읽으며 할머니의 흉내를 내보곤 한답니다. 그 분 밑으로 16세에 시집온 저의 어머니는 시집오신 후 할머니의 그러니까 저의 어머니의 시어머니로부터 매우 철저한 가르침을 받았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의 어머니께서는 제가 어머니를 가장 존경하듯 저의 어머니는 시어머니를 세상에서 가장 존경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저처럼 대학 그리고 대학원을 나오지는 않으셨으나, 그 분의 말씀은 참으로 준엄했습니다. 그리고 어머님의 평소 말씀은 판결문과도 같았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배우지 않은 분이 어쩌면 저같이 논리적인 이야기를 할 수가 있을까…….’ 하고 말입니다.

법을 전공한 저 역시 한마디 할 수 없을 만큼 매사에 매우 논리적이셨습니다. 저는 이 세상에서 누구를 제일 존경하느냐고 묻는다면, 어머니라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어머님을 위해 고향집터에 사모정을 짓고 그 곳에 3도(전라, 경상, 충청)의 젊은이들에게 효와 신의에 대해서 강의를 할 수 있는 학당을 짓고자 진행 중입니다. 저는 어머니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어느 날 말입니다, 퇴근했더니 산하기관 사람이 집에 사과 한 궤짝을 놓고 갔더군요. 집사람이 별 생각 없이 받아뒀던 겁니다. 저녁 밥상에 앉으니 어머니가 ‘말단 공무원으로 들어가 저런 사과 상자나 받아먹으려면 당장 그만두고 장사나 해라.’며 추상같이 호통을 치시더라고요. 아마 어머님은 고시를 준비했던 자식 놈이 고등고시는 그만두고 말단 공무원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 편치 않으셨던 것 같아요. 공직에 들어가자마자 뇌물이나 받아먹고 있다고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당시 아마 어머님 마음이 매우 착잡하고 불쾌하셨던 것 같습니다. 집사람이 슬그머니 사과 상자를 돌려주려고 나갔다가 통행금지에 걸려서 그날 집에 돌아오지 못했죠.』그 일이 정년퇴임까지 청렴한 공직 생활을 하게 만든 동력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 어머니와의 일화를 진솔하게 들려주고 있는 장 동문 >
   
 

Q3. 재경부에서 근무 한 후 정년퇴임 하셨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공직 생활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우리 재정경제부는 산하 기관이 전부 금융기관입니다. 그래서 연봉이 10억 가까이 되는 금융 기관장등으로 나가 여생을 준비 합니다. 다들 후일을 준비를 하는데요, 저는 57년 만에 재정경제부에서 처음 정년을 하는 재정경제부 정년 퇴임자 제 1호가 된답니다. 그런데 연봉 4천만원짜리를 고집한 것이 공직생활에서 나에게 첫 번째 기억에 남는 일이고요.

둘째, 제가 재정경제부 감사실에 근무하고 있을 때, 한보 사건이 터지자 감사원에서 재정경제부에서 한보 감사를 잘못하여 한보가 부실해졌다고, 지적하고 감사실 책임자인 나에게 징계 조치를 하였습니다. 저는 그것이 부당하다고 주장하고 즉각 감사원에 이의신청을 냈고, 그 일은 감사원이 생기고 처음으로 감사원 처분에 불복해서 승소한 사건으로 감사원 역사에 기록되어 있을 것입니다.

셋째, 2005. 12. 30, 3시 퇴임식을 했답니다. 그런데 말이지요, 12월 30일 2시 50분까지 결재를 했던 사람입니다. 아마도 이 세 가지는 공무원 역사에 꼭 기록 될 만한 사건이 됩니다!

 

   
 
   
  < 서울 법대 최고 지도자 과정에서 한국적 민주주의에 대해서 난상토론을 하고 있다 >
   
 

Q4. 융창저축은행을 동문들에게 홍보하신다면?

대한민국에서 제일 좋은 회사입니다. 회사에서 누가 경비를 쓰던 사용 경비 일체를 전산에 기록, 직원이 열람토록 하고 있어 회사에 단 한 푼도 잘못된 경비가 집행될 수가 없습니다. 그가 회장이든, 사장이든, 말단에서 최정상까지 말입니다. 대한민국에서 그 같은 회계 업무를 취급한 회사는 몇 개 안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투명하고 깨끗한 회사입니다. 회사 직원 모두가 자부심으로 회사를 위해서 열심히들 일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재무 구조가 튼튼한 국내의 최정상 수준의 회사입니다. 금융기관이기 때문에 담보를 위주로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우리 회사가 주로 하는 대출은 채무자의 마음을 담보로 합니다.

담보가 없더라도 채무자가 돈을 떼먹지 않고 꼭 갚을 것이라는 확신, 그 마음을 담보로 돈을 주는 특별한 회사입니다. 말하자면, 회사는 담보를 심사하는 것이 아니고, 채무자의 마음을 심사해서 아무리 어렵더라도 융창의 돈은 떼먹지 않는다는 철학이 있는 사람에게는 담보 없이도 대출을 합니다.

저는 오래전부터 동양에서 제일 안정적인 그라민 은행을 만들어보고자 자료를 수집 중에 있습니다. 그라민 은행이란, 순수한 신용으로만 여신을 취급하는 서민을 위한 금융기관을 말하는 것입니다.

 

 
   
  < 융창을 소개하며 그라민 은행 설립에 대한 포부를 밝히고 있다 >
   
 

Q5. 회사의 경영철학을 소개해주세요.

저는 회사 구성원 모두가 국내 금융기관 중에서 최고의 봉급을 받아가는 직원들이 되도록 하는 것이 제 바램입니다. 그리고 제 철학이기도 하지요. 업무 투명성에는 국내에서 최고이지만 규모가 작아 아직 직원들에게 그 같은 수혜를 베풀지 못하고 있습니다. 매우 가슴아파하고 있어요. 그러나 언젠가는 꼭 해내고 말겠습니다.

내가 회사에 온 뒤로 책임자 전원에게 골프채를 구입해주고, 골프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골프는 세상을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운동이라고 생각해서요. 골프는 티업해서 18홀 돌 때까지 볼을 만지고 싶은 충동을 수도 없이 하게 되는데요, 그것을 참고 견디는 인내가 필요하지요. 자기 양심과의 싸움 말입니다. 골프는 그래서 가치 있는 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운동을 간부에게 교육하듯 시키고 있어요. 골프에서 진솔하게 진행하는 방법을 익힌다면, 회사일도 진솔할 것이라고 확신 하니까요. 설령 진솔하지 못한 사람도 그 같은 진실할 수 있는 게임을 통해서 그 행위가 교육으로 승화될 테니까요. 저는 사람이 진솔해질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 서울 법대 호문혁 학장으로부터 최고 지도자과정에서 우수자상을 받고 있다 >
   
 

Q6. 요즘처럼 어려울 때 서민들에게 친구처럼 다가갈 수 있을 텐데요.

지금 말입니다, 우리 국민들이 열심히 수출해서 벌어놓은 돈을 유가 상승으로 전부 산유국에 가져다주고 국내에 머무를 자금이 없어요. 그래서 내수 경기가 어렵습니다! 더욱이 금리까지 상승해서 금융비용까지 증가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세금이 조금이나 비쌉니까? 세금 인상과 물가까지 겹쳐 참으로 서민 모두가 살기 힘들어합니다. 이런 때 서민들의 살림살이는 오죽하시겠습니까? 이런 것을 두고 우리는 서민들의 삶이 사면초가라고 하지요. 이 놈의 세상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되었으니까요.

애환 있는 서민이 있다면, 즉시 찾아오도록 해주십시오. 반갑게 상담하고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누구나 돕겠습니다. 그리고 좋은 금융기관은 누구나 남자라면 하나씩 인연을 가져 두는 것이 좋습니다. 급한 경우가 생기면 내 쌈짓돈처럼 이용할 수 있는 그러한 금융기관 하나쯤 만들어 두는 것이 사람이 살아가는 지혜가 아닌지요! 우리 동문들 우리 은행을 잘 이용해 보시라고 전해주세요. 정말 괜찮은 금융기관입니다. 그리고 우리 직원들도 회장 동문이라고 한다면 최선을 다해 대접해 줄 테니까요!

 

 

Q7. 동문회 산하 골프회 회장을 맡고 계신데...

1955년 개교를 시작하여 전라북도 남동지역을 대표하는 유서와 뿌리 깊은 남원 고등학교 동문들이 모여, 춘향골 동문 골프회로 시작한 모임입니다. 매 달 셋째 수요일은 많은 선ㆍ후배 간의 돈독한 정을 나누고, 서로의 소식을 묻고 들으며, 도움이 필요한 동문이 있으면 서로 돕고, 남는 것은 나눠 쓰고 모자란 것은 채워주는 사랑과 정이 넘치는 끈끈한 자리가 되고 있습니다. 동문 골프 회장이 해야 하는 일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내가 동문 골프회를 통해서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첫째, 후배들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일들, 후배들에게 귀감이 될 훌륭한 선배님들과 시간을 같이 하면서 그 분이 가지고 살아온 철학, 그리고 사회생활을 함에 있어 배울 수 있는 것은 작은 것 하나 놓치지 않고 배울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랍니다.

둘째, 자기를 위해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항시 남을 배려해주는 생각을 갖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면서 남을 위해서 살 수 있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닐 테니까요! 그러나 우리 남고 출신들 중 남을 위해서 살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교육은 성공한 교육이 될 것입니다.

셋째, 골프 모임에 참여하고 나면 후회하지 않고 무엇인가 얻어가는 모임. 그리고 집에 돌아갈 때는 뿌듯한 가슴과 내일의 희망을 안고 돌아가게 하는 모임, 사람들이 모여 살아가는 삶터, 바로 그 같은 모임의 광장을 만들어 주고자 합니다.

한 가지 더 우리 동문들에게 첨언 하자면, 남원을 대표하는 춘향골 동문 골프동호회는 지금 가장 좋은 시간에 가장 저렴한 비용으로 골프를 즐기고 있습니다. 또한 누구나 우리 동문이라면 와서 즐길 수 있습니다. 저는 선배님을 모시고 후배들에게 할 수 있는 일이면 최선을 다하고자 노력을 할 것입니다. 그런데 워낙 제가 시간이 없어 회장직을 그만 두어야 할 텐데 말입니다.

 

 



Q8. 앞으로 모교 및 동문회 발전 방향을 제시한다면?

명문고는 가만히 있어도 자연히 시간이 지나면 명문고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명문고는 인위적으로 부단한 노력을 했을 때만 명문고가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동문들의 관심이 필요합니다. 전국에서 좋은 교사를 확보하고 그들이 마음 놓고 학생들을 지도할 수 있도록 재정적 그리고 환경적으로 아낌없는 지원을 했을 때만 명문고가 만들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다녔던 남원고가 명문이 되고, 좋은 후배들이 계속 사회에 나와 모두 참여해서 큰 동양이 될 때에만 모교도 동문도 발전하게 되는 것이지요! 여러 동문들의 협조적 참여와 성원만이 우리 남원고 동문의 발전을 기약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앞으로도 꾸준한 정기 모임 혹은 골프ㆍ등산 등 동호회를 통하여 서로의 소식에 귀를 기울이고, 미처 바쁘거나 멀어서 연락이 닿을 수 없었던 동문들에게도 서로의 소식과 동문회의 소식을 알리고,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후배들에게도 더욱 분발 할 수 있는 Motive를 제공해야, 남원 고등학교와 우리 동문회는 앞으로 더 나은 발전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을 확신합니다.

 


 

 
   
  < 모교 발전이 곧 동문회 발전이라며 모교생들과의 온라인 커뮤니케이션을 강조하고 있다 >
   
 

Q9. 학창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은사님이 계신다면?

우리는 남원 고등학교 3년간을 이기충 선생님을 모시고 줄곧 졸업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기충 선생님께서는 우리들을 입학에서부터 졸업까지 시켜주셨습니다. 우리 동기 동창들이 남들보다 사회에 많이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훌륭하신 선생님 밑에서 3년간 남다른 교육을 받은 영향이 적지 않다고 봅니다.

선생님은 우리 모두의 부모 같은 존재였고, 졸업 후에도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산소 같은 것을 제공해 주시고 삶과 인생에 관해서 지도를 해주셨다고 봅니다. 아무튼 이기충 선생님은 서울사범대학을 나오셨지만, 남고에는 남다른 애정을 가지시고 계실 것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Q10. 고교 시절 추억의 에피소드 한 가지 들려주세요.

사람이 성공할 수 있는 것은 교육이 전부라고 봅니다. 우리는 남원 중학교 1학년 때, 지금 남원버스터미널 근처가 아닌가 하는데요, 그때는 국수 여관 자리라고 알고 있어요. 그 때 군용천막을 학교 교실삼아 다니고 있을 때, 지금의 향교리 학교가 만들어져 시내에서 자기가 쓰던 책상들을 둘러메고 그 먼 곳으로 가다가, 향교 다리 밑 개천에서 흐르는 물에 책상을 씻어 다시 짊어지고 학교로 갔습니다. 책상 하나의 이삿짐을 둘러메고 하루 종일 이사를 한 셈이지요.

지금 중학교 학생들에게 그런 일을 시키면 하겠습니까? 아마 교사들을 가만두지 않겠지요. 그리고 인터넷에 올려서 항의를 했거나, 아니면 자동차로 실어가서 ‘왜 아이들에게 그 무거운 책상을 짊어지게 했느냐’고 항의한 학부형이 부지기수겠지요.

우리는 그 같은 일들을 묵묵히 했었고, 그런 일들을 당연히 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것이 지금의 학생과 우리가 다른 점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도 해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학생들은 과연 그럴까요?

 

 
   
  < 자금세탁에 대한 전문가답게 사회 부패의 고리를 끊는 방법을 얘기하고 있다 >
 


Q11. 후배 동문들에게 메시지를 보낸다면?

저는 후배들에게 아직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유보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아직은 후배들에게 조언할 만큼 성공한 선배라고 하기엔 먼 사람입니다. 다만 후배들에게 부탁이 있다면, 건전한 생각을 가질 수 있는 몸을 쉼 없이 만들어 주도록 노력을 해주었으면 합니다. 건전한 생각은 건강한 몸에서만 분출된다고 생각하니까요.



Q12. 가족 자랑 좀 해주세요.

저는 두 남자 아이와 하나의 딸아이를 두었습니다. 큰 아이는 미국에 유학 갔다가 좋은 여자를 만나 그 곳에서 사업을 하고 있고요, 작은 아이는 북경 대학을 졸업하고 중국의 친구들이 미국 쪽보다 영국에 더 많이 유학을 간다고 합니다. 중국의 친구들을 따라 영국으로 유학을 가 있어요.

나머지 딸이 하나 있는데, 제 여식이 이재에 밝은 편이지요. 그래서 지금의 회사를 맡고 있는데요, 아마 후계자가 될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동문 중에 좋은 신랑감이 있어 장가를 오게 된다면, 그 사람은 일거양득을 하는 셈이 될 텐데요!

 

 
   
  < 해외 자금세탁 방지청들의 요청으로 강의 후 부인와 함께 >
   
 

Q13. ‘자금세탁 방지 제도의 이해’라는 책을 집필하여 좋은 평을 받고 있고 다른 저서들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자금세탁 방지제도의 이해’는 지금 경찰, 검찰에서 교육 교재 등으로 매우 유용하게 쓰고 있습니다. 제가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는, 그간 30년간 국가로부터 받은 수혜를 조금이나마 국가에 보답하고자 하는 일념으로 우리나라 금융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고뇌하던 끝에 그 동안 업무 경험을 정리해서 남김으로써 그 책을 보고 금융 기관의 자금세탁 업무 종사자들이 글로벌 시대에 걸맞은 업무에 종사 할 수 있게 도와줌으로써 수조원의 사회적 비용이 수조원의 사회적 이익으로 바꿔질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책을 집필하게 된 것입니다.

이는 생각대로 국제 관계에서 업무 외 밑거름으로 우리의 조달자금 금융 코스트가 절감되고 우리 선거 문화에도 깨끗한 선거를 치를 수 있도록 하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는 책인 것만은 확실합니다. 그리고 저는 일본 우경화에 관한 책을 집필해 내면서 그 책 판매대금일체를 정신대 할머니들이 쓸 수 있도록 계좌 개설을 해서 지원했습니다. 그리고 작년에는 그 책과 정신대 할머니의 눈물겨운 수기를 영어로 번역, 미국 상ㆍ하의원에 보내어 미국 의회의 의사 결정에 결정적 지원을 했습니다.

 

 
   
  < 한문모임 求人會를 만들어 孝와 信에 대해 매주 공부하고 있다 >
   
 

Q14. 공직에 계시면서 훌륭한 상을 많이 받으신 것으로 아는데…….

공무원으로서는 각 분야별로 많은 표창을 받은 것이 사실입니다. 저는 35년간 공직에 있으면서 맡은 분야에서 일을 하면서 최선을 다하는 공직자가 되고자 노력을 했습니다.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면서 살았습니다.

누구에게 잘 보이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저는 오직 공직에 있는 한 국가를 위해서 일을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국가의 녹봉을 받는 한 국가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만을 했습니다. 그 같은 생각이 표창을 받게 된 동력이 되었다고 봅니다.


Q15. 끝으로 즐겨 부르시는 노래가 있다면?

저는 술만 마시면 ‘고향의 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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